문성은(겨레하나 대학생본부 기획국장, 서울산업대학교 3학년)
어렸을 때부터 도자기를 무지 만들어 보고 싶어했던 나는 도자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들떠 있었는데 응향원의 전체적인 건물의 소재가 나무라는 점에서 또 한번 이곳에 오게 된 것을 행운으로 여기고 있는 바였다. 도자기를 만들러 간다는 소리에 멋도 모르고 따라왔던 내가 이곳의 주인을 알리없었다. 그 분은 도공인인 응향 박춘숙 선생님 이셨다. 큰 자기를 만든다기에 남성일 줄 알았는데 여성분이라니. 하지만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컬컬한 목소리와 표정은 예술가의 기풍과 견고함을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통일로 나아가는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 곳에 왔다. 뚱딴지 코너에서 우리의 초짜도자기를 만들어 전시하고 이를 판매하여 기금을 마련하는 것이다. 여기에 응향 선생님의 통일관이 결부되어 선생님의 많은 도움이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가 이곳에 온 이상 프로처럼 도자기를 만들라고 하시면서 어찌 볶아 먹을까 하는 눈빛으로 우리는 보시는데, 가히 큰 맘먹고 해야겠구나 하고 정신이 바짝 들었다.
흙에 본격적으로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시범 뒤 저녁을 먹은 후 부터였다. 응향 선생님께서는 작업장에서는 술을 절대 취급하지 않으셨다. 강원도 산위의 공기좋은 숙소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술을 못먹는다는건 우리에겐 큰 욕구하나를 참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의 법이라고 할 수 있는 선생님의 철학을 깬다는 건 많은 민폐일거라 생각하고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사실 작업하느라고 밥을 제때 먹지 못한 터였다.) 저녁을 먹은 후 작업장. 각자 자신이 만들 그릇을 생각하며 어릴적 점토를 만지듯 그릇을 빚었다. 컵, 주전자, 접시 그리고 중바리. 작업장은 어느새 불빛을 좇아온 나방, 모기, 산벌레들의 날개짓과 흙빚는 소리로 채워졌다. 이렇게 첫째 날 밤이 무르익고 있었다. 새벽 2시쯤. 도자기 삼매경에 빠져 각자 프로정신을 발휘하고 있을 때 4대 욕구 중 하나를 참을 수 없어 나는 소리. 꼬르륵- “야식 먹고 합시다.” 너무나 반가운 한 마디였다. 김이경 총장님께서는 작업하는 우리 뒤를 계속 신경써주시면서 점심과 저녁을 만드시고 야식까지 챙겨주셨다. 라면엔 콩나물, 파 등이 들어가서 시원한 해장라면을 연상케했다. 술을 먹은 것도 아니었으나 해장되는 듯 했다. 야식 후 또 작업을 하러 갈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건 오산이었다. 응향 선생님께서는 작업도 몰입해서 하셨지만 이야기는 더욱 그러하셨다. 한번이야기를 하시면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그 이야기는 어언 밖이 밝아지고 한둘 일어나는 사람이 오고서야 끝이 났다. 아침 11시였다. 부랴부랴 숙소에 들어가서 잠을 청했다. 점심을 먹으라는 소리에 충혈 된 눈을 반쯤 뜨고선 아까 이야기가 끝났던 부엌으로 갔다. 1시였다. 산이라 그런지 잠을 많이 못 자서 피곤할만한데도 산소량이 많아서 활동하는데 별 지장이 없는 것 같다.
이틀 째 밤이 깊어가고 있다. 우리는 어제 씻지 못한 몸을 그 좋다는 쑥이 걸려있는 러시아식 사우나에서 지금껏 쌓여왔던 피로를 풀었다. 밖에는 비가 추적추적내리고 있지만 도자기한테는 이런 날씨가 최상이라고 했다. 사우나를 마치고 그렇게나 마시고 싶어 했던 막걸리를 원 없이 먹으며 마지막 날 저녁을 꽃 피우고 있는데 - 갑자기 들려오는 공포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외침. 선생님께서는 바로 그 자리를 박차고 작업실로 가셨다. 뒤이어 순미언니도 따라 갔다가 이내 돌아오는데. 무슨일이냐는 우리의 물음에 언니는 말이 없었다. 설마- 하는 불안함을 안고서 나랑 누리는 작업장으로 부랴부랴 갔다. 웬걸 - 중바리가 없어졌다. 아니 중바리가 없어진게 아니라 아래쯤에서 찢어져서 사방으로 시체가 널부러져 있었다. 세상에 - 이렇게 가는구나. 장인은 아무나 하는게 아니구나. 처음 만든 중바리가 성공할거라는건 오만이었구나. 하는 별의 별 생각이 뇌리를 스치면서 안팎으로 색옷도 입은 중바리가 말없이 찢어져있는 모습을 한참 보고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중바리가 찢어진부분을 가리키면서 왜 이렇게 됐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그 순간 나는 도자기를 만들고 굽는 과정이 통일운동의 과정과 겹쳐서 이해되는 건 왜 일까. 한 번의 시도로 도자기가 완성되지 않는 것 처럼 한번의 몸짓과 노력이 통일을 만들 수 는 없는 것이었다. 긴 세월동안 많은 시도를 거쳐서 지금 까지 많은 사람들이 통일운동을 해왔지만 아직 통일이 되지 않은 우리의 현실이 지금 내 앞에 보이는 찢겨진 중바리의 현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선생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이렇게 찢겨진 중바리를 보고 충격과 실망에 사로잡혀 선생님 곁을 떠난 이야기를 해주시면서 마음을 다잡기 위해 백자 접시에 색을 칠하신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찢겨진 중바리를 생각하며, 통일운동이 힘든 이 시점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할까 고민했다. 찢겨진 중바리를 보고 울어버리고 말아야 할까 아니면 꿋꿋히 중바리가 완성될 때까지 집요한 근성으로 중바리를 구워내고 말 것인가. |
문성은(겨레하나 대학생본부 기획국장, 서울산업대학교 3학년)
어렸을 때부터 도자기를 무지 만들어 보고 싶어했던 나는 도자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들떠 있었는데 응향원의 전체적인 건물의 소재가 나무라는 점에서 또 한번 이곳에 오게 된 것을 행운으로 여기고 있는 바였다. 도자기를 만들러 간다는 소리에 멋도 모르고 따라왔던 내가 이곳의 주인을 알리없었다. 그 분은 도공인인 응향 박춘숙 선생님 이셨다. 큰 자기를 만든다기에 남성일 줄 알았는데 여성분이라니. 하지만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컬컬한 목소리와 표정은 예술가의 기풍과 견고함을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통일로 나아가는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 곳에 왔다. 뚱딴지 코너에서 우리의 초짜도자기를 만들어 전시하고 이를 판매하여 기금을 마련하는 것이다. 여기에 응향 선생님의 통일관이 결부되어 선생님의 많은 도움이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가 이곳에 온 이상 프로처럼 도자기를 만들라고 하시면서 어찌 볶아 먹을까 하는 눈빛으로 우리는 보시는데, 가히 큰 맘먹고 해야겠구나 하고 정신이 바짝 들었다.
흙에 본격적으로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시범 뒤 저녁을 먹은 후 부터였다. 응향 선생님께서는 작업장에서는 술을 절대 취급하지 않으셨다. 강원도 산위의 공기좋은 숙소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술을 못먹는다는건 우리에겐 큰 욕구하나를 참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의 법이라고 할 수 있는 선생님의 철학을 깬다는 건 많은 민폐일거라 생각하고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사실 작업하느라고 밥을 제때 먹지 못한 터였다.) 저녁을 먹은 후 작업장. 각자 자신이 만들 그릇을 생각하며 어릴적 점토를 만지듯 그릇을 빚었다. 컵, 주전자, 접시 그리고 중바리. 작업장은 어느새 불빛을 좇아온 나방, 모기, 산벌레들의 날개짓과 흙빚는 소리로 채워졌다. 이렇게 첫째 날 밤이 무르익고 있었다. 새벽 2시쯤. 도자기 삼매경에 빠져 각자 프로정신을 발휘하고 있을 때 4대 욕구 중 하나를 참을 수 없어 나는 소리. 꼬르륵- “야식 먹고 합시다.” 너무나 반가운 한 마디였다. 김이경 총장님께서는 작업하는 우리 뒤를 계속 신경써주시면서 점심과 저녁을 만드시고 야식까지 챙겨주셨다. 라면엔 콩나물, 파 등이 들어가서 시원한 해장라면을 연상케했다. 술을 먹은 것도 아니었으나 해장되는 듯 했다. 야식 후 또 작업을 하러 갈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건 오산이었다. 응향 선생님께서는 작업도 몰입해서 하셨지만 이야기는 더욱 그러하셨다. 한번이야기를 하시면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그 이야기는 어언 밖이 밝아지고 한둘 일어나는 사람이 오고서야 끝이 났다. 아침 11시였다. 부랴부랴 숙소에 들어가서 잠을 청했다. 점심을 먹으라는 소리에 충혈 된 눈을 반쯤 뜨고선 아까 이야기가 끝났던 부엌으로 갔다. 1시였다. 산이라 그런지 잠을 많이 못 자서 피곤할만한데도 산소량이 많아서 활동하는데 별 지장이 없는 것 같다.
이틀 째 밤이 깊어가고 있다. 우리는 어제 씻지 못한 몸을 그 좋다는 쑥이 걸려있는 러시아식 사우나에서 지금껏 쌓여왔던 피로를 풀었다. 밖에는 비가 추적추적내리고 있지만 도자기한테는 이런 날씨가 최상이라고 했다. 사우나를 마치고 그렇게나 마시고 싶어 했던 막걸리를 원 없이 먹으며 마지막 날 저녁을 꽃 피우고 있는데 - 갑자기 들려오는 공포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외침. 선생님께서는 바로 그 자리를 박차고 작업실로 가셨다. 뒤이어 순미언니도 따라 갔다가 이내 돌아오는데. 무슨일이냐는 우리의 물음에 언니는 말이 없었다. 설마- 하는 불안함을 안고서 나랑 누리는 작업장으로 부랴부랴 갔다. 웬걸 - 중바리가 없어졌다. 아니 중바리가 없어진게 아니라 아래쯤에서 찢어져서 사방으로 시체가 널부러져 있었다. 세상에 - 이렇게 가는구나. 장인은 아무나 하는게 아니구나. 처음 만든 중바리가 성공할거라는건 오만이었구나. 하는 별의 별 생각이 뇌리를 스치면서 안팎으로 색옷도 입은 중바리가 말없이 찢어져있는 모습을 한참 보고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중바리가 찢어진부분을 가리키면서 왜 이렇게 됐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그 순간 나는 도자기를 만들고 굽는 과정이 통일운동의 과정과 겹쳐서 이해되는 건 왜 일까. 한 번의 시도로 도자기가 완성되지 않는 것 처럼 한번의 몸짓과 노력이 통일을 만들 수 는 없는 것이었다. 긴 세월동안 많은 시도를 거쳐서 지금 까지 많은 사람들이 통일운동을 해왔지만 아직 통일이 되지 않은 우리의 현실이 지금 내 앞에 보이는 찢겨진 중바리의 현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선생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이렇게 찢겨진 중바리를 보고 충격과 실망에 사로잡혀 선생님 곁을 떠난 이야기를 해주시면서 마음을 다잡기 위해 백자 접시에 색을 칠하신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찢겨진 중바리를 생각하며, 통일운동이 힘든 이 시점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할까 고민했다. 찢겨진 중바리를 보고 울어버리고 말아야 할까 아니면 꿋꿋히 중바리가 완성될 때까지 집요한 근성으로 중바리를 구워내고 말 것인가. |